“냄새 난다” 민원에…서울 은행나무 최소 792그루 사라진다
서울 25개 자치구가 올해 수종 교체 사업을 통해 은행나무 최소 792그루를 제거할 계획이라는 시민단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일부 자치구에서는 안전상 큰 문제가 없는 나무까지 열매 냄새와 보행 불편을 이유로 교체 대상에 포함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환경연합은 시민 24명과 함께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연차별 가로수 계획’을 분석한 결과를 담은 ‘2026 가로수 계획 모니터링 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서울에서 바꿔심기 사업으로 사라지는 은행나무는 최소 792그루다. 자치구의 연차별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 수종 교체 사업까지 고려하면 실제 제거되는 은행나무는 더 많을 것으로 서울환경연합은 추정했다.
“민원 해결” 내세웠지만 구체적 근거 부족
서울환경연합은 수백 그루의 나무를 제거하는 사업임에도 상당수 자치구 계획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자치구들은 은행나무를 다른 수종으로 바꾸는 이유로 ‘민원 해결’과 ‘보행 경관 개선’, ‘시민 불편 해소’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원 건수나 주민 의견 수렴 결과, 나무별 안전성 평가 등 객관적인 자료는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목 진단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결과와 교체 결정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은 사례도 확인됐다.
서대문구는 통일로 은행나무 7그루를 교체하기에 앞서 나무병원에 의뢰해 단층촬영을 실시했다. 진단 결과 해당 나무들은 부후도 B등급과 C등급을 받았다.
B등급은 뚜렷한 결함이 없어 위험성이 낮은 상태이고, C등급은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상태다. 당장 쓰러질 우려가 크거나 긴급 제거가 필요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단조사 보고서는 악취와 보행 불편 등을 이유로 수종 교체를 권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무의 구조적 위험성보다 열매 냄새와 생활 불편이 교체 결정에 더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주민 73% “베지 말고 열매 수거·가지치기”
은행나무 제거가 주민 다수의 요구인지도 불분명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 5월 동대문구가 무학로 안암오거리에서 시립동부병원 앞까지 약 1㎞ 구간의 은행나무 61그루를 제거하려 하자, 한 주민이 지역 기반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주민 의견을 물었다.
응답자 83명 가운데 61명은 은행나무 제거에 반대하거나 열매 수거와 가지치기 같은 대안적 관리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약 73%다.
구체적으로는 ‘열매 수거와 가지치기 관리’를 선택한 주민이 28명으로 가장 많았다. ‘베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응답은 25명, ‘냄새는 나지만 베지 않아도 괜찮다’는 응답은 8명이었다.
서울환경연합은 은행 열매 냄새에 대한 일부 민원이 있더라도 수십 년 자란 가로수를 일괄적으로 제거하기에 앞서 주민 전체의 의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조해민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아무리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도시의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품는 가치는 단기간의 불편함을 훨씬 뛰어넘는다”며 “장기적인 관점으로 가로수를 가꿔나가야 하는 행정이 목소리 큰 사람 몇 명의 민원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원칙, 데이터, 객관적인 위험성 평가로 대응해 나무와 담당 공무원을 보호하고, 다른 주민들의 의견도 함께 듣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도 “단순 수종 교체 위한 제거 신중해야”
기후에너지환경부도 2023년 3월 발표한 ‘도시 내 녹지관리 개선방안’에서 단순히 수종을 바꾸기 위해 기존 나무를 제거하는 행위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오래된 가로수는 여름철 도심 온도를 낮추고 미세먼지와 탄소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새 나무를 심더라도 기존 나무와 비슷한 수준의 그늘과 생태적 기능을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서울환경연합은 이번 조사 결과를 지난 20일 서울시와 25개 자치구 가로수 담당 부서에 전달했다. 단체는 가로수 제거에 앞서 객관적인 위험도 평가와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의무화하고, 열매 수거와 가지치기 등 대체 관리 방안을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