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핵실험, 오늘날 지구 대기 과학의 실마리가 되다

남극 Hercules Névé 빙하시추 현장과 빙하코어
[극지연구소]

1950년대 태평양 핵실험의 흔적이 반세기 넘게 남극과 그린란드의 얼음 속에 남아 있었다. 국내 연구진이 이 미세한 방사성 물질을 단서로 지구 대기 순환의 계절적 패턴을 밝혀냈다.

극지연구소는 27일 “남극과 그린란드 빙하에 남은 플루토늄-239의 미량 흔적을 정밀 분석해, 공기가 성층권에서 대류권을 거쳐 극지로 이동하는 과정을 계절 단위로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1950년대 미국이 태평양 마셜제도에서 실시한 대기권 핵실험의 낙진이 어떻게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는지를 실증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연구팀은 남극과 그린란드 등 4개 지점의 빙하코어를 채취해 1950~1980년 사이 얼음 속에 쌓인 플루토늄-239의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1952년 ‘아이비 마이크(Ivy Mike)’ 실험과 1954년 ‘캐슬(Castle)’ 실험의 흔적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두 실험은 같은 지역에서 진행됐지만, ‘캐슬’의 흔적은 남극 빙하에 뚜렷하게 남은 반면 ‘아이비 마이크’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늦게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 차이를 대기의 계절적 변동에서 설명했다. 핵실험으로 방출된 미세 입자가 성층권으로 상승한 뒤 대류권으로 이동하거나 극지로 향하는 과정이 계절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남반구 여름철에는 성층권과 대류권 사이의 물질 교환이 활발해 방사성 물질이 더 빠르게 극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는 실제 빙하 시료를 통해 성층권-대류권 교환이 계절별로 달라진다는 점을 처음으로 실측한 사례로 평가된다. 기존의 이론적 모델이 실증적 근거를 얻은 셈이다.

한영철 박사 연구팀은 플루토늄-239이 얼음 1그램당 10-15그램 수준의 극미량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분석 기술로 연 단위를 넘어 계절 단위의 변화를 정밀하게 구분했다.

신진화 박사는 “과거 핵실험이 남긴 낙진이 오늘날 대기 과학의 새로운 단서가 됐다”며 “지구 대기의 ‘보이지 않는 길’을 추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신형철 극지연구소 소장은 “남극 시료 채취부터 분석, 해석, 모델링까지 국내 연구진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연구”라며 “대한민국의 극지 연구와 분석 역량을 세계에 입증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Science Advances 2025년 10월호에 게재됐다.